김후용 목사 (서해중앙교회 담임목사, 서산포스트신문사 운영이사)

우리의 삶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사랑했던 사람을 잃는 것이다.

지난 1218일에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마치고 강원도 강릉에 놀러간 서울 고교생들이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3명이 숨지고 7명이 의식불명 되는 큰 불행한 사고가 있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의 전부를 주어도 아깝지 않다.

그런 귀한 자식을 갑자기 떠나보낸다는 것이 부모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슬픔이다.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그 자식이 일산화탄소 가스중독으로 어느 날 갑자기 떠나보내니 부모의 슬픔과 절규는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대성고 김 군의 어머니는 한겨레와 한 인터뷰를 통해 아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보냈다.

(12/19) “아들아,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엄마에게 남편이었고 이들이었고 가장이었고 대들보였다. 네가 엄마 꿈에 나타나 나비가 되어 펄럭거리고 날아갔다....”고 했다.

남편과 같은 아들을 잃은 슬픔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으랴.

모든 상실은 다 고통스럽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동반한다.

우리는 사랑했던 자식이나 배우자를 잃을 때 상실의 슬픔이 너무 커서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 잘 믿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자식을 잃은 충격을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사랑했던 자식을 잃은 상실은 현실이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했던 자의 죽음에 대해 밀려드는 엄청난 상실감에 절망한다.

그러면 어떻게 이 상실의 슬픔을 극복할 수 있는가?

엘리자베스 퀴블러는 그녀의 책 상실수업에서 말하길 망연자실한 상실 앞에 우리는 한 없이 자신을 탓하게 된다.

이제 후회할 만큼 후회하고 미워할 만큼 미워하다가 쓰러질 만큼 최대한 울라고 했다.

사랑했던 사람을 상실한 일은 매우 절망스런 상황이며, 그 절망은 극히 정상적이고 적절한 반응이다.

사람이 사랑했던 사람이 죽었는데 절망을 느끼지 않는 것은 오히려 비정상적이다.

정상적인 절망은 삶속에서 일정기간 동안 울어야 한다.

엘리자베스 퀴블러가 말하길 ‘30분 울어야 할 울음을 20분 만에 그치지 말라고 했다.

눈물샘이 마를 때 까지 울어야 한다고 하며 슬퍼한다고 상실의 고통을 잊는 것은 아니고 상실의 고통이 다시 찾아오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다만 슬픔의 눈물을 마를 때까지 충분히 흘릴 때 상한 마음이 치유 된다고 했다.

만약 사랑했던 자를 상실하고도 마음껏 울지 않으면 상실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만약 죽음을 떠나보내지 않으면 그 상실이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에 잊어버리려고 일중독에 빠지게 된다.

아니면 어떤 사람은 사랑했던 자를 잊지 못해 우울증에 빠져 삶의 의욕을 잃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전의 상실의 슬픔을 처리되지 않는 사람들은 초상집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상실을 통해 자신의 상실이 생각나서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으로 인한 슬픔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생은 생자필멸(生者必滅) 회자정리(會者定離)이다.

즉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고 만난 자는 반드시 헤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다.

인생살이에서 죽음과 이별은 중요한 문제이다. 상실 없는 인생은 없다.

우리는 눈물이 마를 때 까지 울고 나서 사랑했던 이의 상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현실 속에 인생을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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